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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개인 비망록

기발한 컨닝기술 해프닝

by 기업인재연구소 2010. 4. 5.
고등학교의 마지막은 정신 없이 지나간다. 대입시험을 보고는 이미 파장인 셈. 그러다보니 3학년 2학기 기말시험은 항상 애매한 상태에 놓인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80~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3학년 2학기 성적은 내신에 들어가지 않았다.  망쳐도 되고 잘 봐도 되는 그런 시험이었던 것이다.

공부는 하기 싫고 담임 선생님 면을 봐서는 성적이 어느 정도는 나와야 했던 상황. 그 당시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발동했던 모양이다. 모두 모여서 대책을 상의하던 중에 한 녀석이 아이디어를 내고 여럿의 의견이 모이자 기발한 컨닝방법이 만들어졌다. 도구는 바로 각자 손목에 있었던 시계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 할까.... 하다가 생략한다. 멋모르고 따라하다가 효과 조금 보고 인생 급 우울해지는 사람들이 생겨날까 경계한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 나는 기말고사 기간 중에 단 한 과목만 공부했다. 그리고 나머지 과목은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지 않고도 무난히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한 가지 해프닝만 빼고 말이다.

사실 비밀이 어디에 있는가. 기말고사 시작 때에는 정예멤버로 시작된 팀 컨닝이 날이 갈 수록 참여인원이 늘었다. 어차피 석차가 중요한 상황도 아니고 면피만 하면 되는 시험. 비밀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알게된 친구들은 모두 시계를 활용했다. 마지막 날이 되자 같은 반에 거의 전원이 컨닝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부작용이 생겨났다.

- 마지막 날 본 과목 평균점수가 다른 반들에 비해 무려 15점 이상이 높았다. 
- 더욱 이상했던 것은 모두 같은 문제에서 틀린 것이다.

이상하다고 느낀 선생님들이 한 명씩 불러다가 조사를 했다. 말하자면 격리심문이었다. 하지만 이걸 밝힐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결국 마땅한 해결책이 없자. 그 과목만 재시험이 치러졌다. 그리고 우리 반엔 감독교사가 4명이 출동했다.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컨닝은 이뤄졌다. 전원이 달려들어 컨닝을 하려면 평균을 상당히 낮춰야 한다는 것을 실감한 우리는 다른 반 평균보다 약간만 높은 수준에서 컨닝을 하고 각자 다른 걸 하나씩 틀리기로 사전 약속을 했다.  결과는 훌륭했다. 철저한 감독하에도 적절한 평균점수, 다양하게 틀린 답안지..

마치 오션스 일레븐 같은 느낌이랄까? 다들 한 동안 모험을 함께 한 동지애를 느꼈다. 컨닝을 하지 말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지만 공포 분위기 하에서도 모두들 동참했고 결국 무사히 해냈다. 어디서 그런 무모함과 용기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게라도 해야,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마지막 시험에 대한 조롱, 혹은 사지선다의 공교육에 대한 약간의 복수를 한 셈이 되어서 였을까? 지금 돌아보면 웃음이나고 참 부끄럽기도 하다.
 
그렇게 고등학교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