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여동생과 한 컷
1972년 제주도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양용은.
미국 프로골프 PGA챔피언에 오른 그에게는 남다른 스토리가 있다.
3남5녀의 네째로 태어났고, 쌍둥이 여동생이 다섯째이다.
제주농고를 다니며 보디빌딩을 했고 몸짱으로 불렸다.
고교 3학년 때 꿈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대학은 갈 수 없는 먼 곳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지만
양용은은 평생 농사를 짓고 살기는 싫었다.
용돈이나 벌어보겠다고 나선 일이 바로 골프연습장에서 공 줍는 일.
공을 주으며 그곳에서 먹고 잤다.
골프에 빠져있는 사람들과 하루를 보내며
저녁에는 연습채를 잡고 휘둘러 보기도 했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골프는 부자나 하는 운동이라는 것.
건설회사에서 굴착기술을 배우다 다치면서 그만두고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의 말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절이었다.
중학생 시절. 위에서 두번째.
골프가 부르다
단기사병으로 군대를 마친 그는 다시 골프연습장으로 갔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도 했지만 골프를 잊을 수는 없었다.
골프장 일을 도우며, 밤이면 낡은 중고채를 휘둘렀다.
선생도 없었고 혼자서 무작정 휘두르는 연습이었다.
조명 시설이 없어서 플래시 하나를 켜두고 밤을 세웠다.
남들 10박스를 칠 때, 100박스를 칠 정도로 골프가 즐거웠단다.
미치다시피 골프공을 때려대던 그는 1996년 5년만에 프로테스트에 합격한다.
성인이 되어 처음 골프채를 잡은 사람이
5년만에 프로테스트를 통과하여 프로가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열심히 한 것 이외에도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는 걸 말한다.
독하게 마음 먹은 양용은은 프로 신인왕에 올랐고
1999년에는 상금랭킹 9위에 올랐다.
하지만 세금을 제외하고 그의 손에 들어온 돈은 1000만원 남짓.
국내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먹고 살 길이 보이지 않았다.
레슨을 하며 연명을 할까 하는 유혹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게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눈물을 삼키며 현해탄을 건너다
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양용은은 비장한 마음으로 일본투어에 도전한다.
보증금 250만원에 월세 15만원 단칸방에 아내와 두 아이들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떠나던 날, 그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났다.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했던 약속, 10년만 기다려달라했던 그 약속을
비행기에서 수도 없이 되내었다.
독하게 시작한 일본투어는 그에게 삶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2004년 일본 투어에서 2승을 올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골프를 아는 사람들에게 양용은 이름 석자를 알렸다.
양용은이 일본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이는
이미 일본투어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종덕 프로다.
김종덕 프로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회출전 등이 만만치 않았을 터,
일본 진출 후 곧 바로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양용은에게 미국투어 진출을 권한 사람은 바로 최경주 프로다.
섬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어려운 환경에서 늦깎이로 성장하는 후배를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미국무대에 이끌어준 것이다.
하지만 미국무대 데뷔는 쉽지 않았다.
2005부터 자격시험인 퀄리파잉 스쿨에서 두 번 연거퍼 떨어진 것이다.
물론 이 기간 커다란 성과도 있었다.
2006년 한국 오픈 우승선수의 자격으로 출전권을 얻은
유럽투어 HSBC챔피언십에서 타이거우즈를 꺾고 우승컵을 안은 것.
이때 이미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양용은은
2009 PGA챔피언십에서 다시 한번 우즈를 꺾는 기염을 토하며
우즈 킬러로 부상하게 된다.
미국무대에서
2008 퀄리파잉 스쿨 3수만에 가까스로 통과하여
대망의 미국무대에 나섰지만 역시 미국무대는 쉽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과는 달리 코스의 길이가 길었고
세계 정상급 선수들에 비해 비거리에서 밀리는 그로서는
경기 운영에서 많은 핸디캡이 있었다.
결국 29개 대회에 나섰지만 절반이 넘는 17차례에서는
컷통과마저 못하였고 상금순위는 157위로 밀려났다.
천신만고 끝에 쟁취한 투어자격도 날라갔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핸디캡을 절감한 그는 본토의 체계적인 레슨을 받았다.
처음부터 독학으로 시작한 그는 체계적인 레슨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스윙교정을 위해 기초 ABC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양용은은 이때를 회상한다.
"골프 인생을 건 마지막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죽을 각오로 스윙교정에 매달렸다."
또한 비거리 극복을 위해 새로운 클럽을 장착했다.
우드의 거리와 아이언의 정확성을 겸비한 하이브리드 클럽을 갈고 닦았다.
200야드가 넘는 거리에서도 핀에 볼을 가까이 붙일 수 있게 되면서
항상 좌절해야 했던 롱파4홀에서도 서서히 자신감이 생겨났다.
올해 다시 퀄리파잉 스쿨에 합격했지만 그는 대기자 신분이다보니
출전 예정선수가 불참해야 기회가 주어지는 신세였다.
1월 소니오픈에서는 하와이까지 날라가 결국 자리가 나지 않아
상당한 비용만 날리고 돌아오는 서러움을 겪기도 했다.
마침내 꿈을 이루다
그러던 그에게 결국 기회가 찾아왔다.
3월 혼다 클래식에서 PGA 첫승을 신고한 것이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2009년 8월, 양용은은
골프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PGA챔피언십에서
그것도 이 시대 최고의 골퍼로 불리는 타이거우즈와 맞붙어 우승한다.
우즈가 3라운드까지 리드하던 경기에서 막판에 역전당한 경우는
평생을 통틀어 37번 가운데 단 한 번,
메이저 14차례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을 만큼
우즈는 4라운드에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그의 카리스마에 세계 정상급 선수들도 질려버리고 스스로 무너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양용은은 달랐다.
위기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샷을 날렸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스윙교정의 효과가 그를 새롭게 만들었고 새로 장착한 클럽이 빛을 발했다.
그의 거침없는 샷에 주눅이든 것은 오히려 타이거 우즈였다.
심리적으로 흔들린 우즈는 퍼트에서 번번히 고개를 떨궜다.
삶의 명장면
지금 자신이 꿈꾸던 인생 최고의 명장면,
그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 감동을 자아내고 있는 양용은.
생활기록부에 남아있는 17살 그는 단지 '내성적이지만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학생'이었다.
이제 그는 그의 모교인 제주고(옛 제주농고) 교문에 플랭카드가 걸린 사람이 되었다.
학교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하면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용은이의 모습에서 학생들이 많은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미국 진출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양용은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꿈을 향해 도전한다면 반드시 기회는 찾아옵니다. 최경주 프로도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성공했다고 봅니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실패해도 또 다른 연장전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인터뷰에서 그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골프코스에 서면 가슴이 뿌듯해요. 어린 시절 제가 여기 서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소명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단기사병으로 군대를 마친 그는 다시 골프연습장으로 갔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도 했지만 골프를 잊을 수는 없었다.
골프장 일을 도우며, 밤이면 낡은 중고채를 휘둘렀다.
선생도 없었고 혼자서 무작정 휘두르는 연습이었다.
조명 시설이 없어서 플래시 하나를 켜두고 밤을 세웠다.
남들 10박스를 칠 때, 100박스를 칠 정도로 골프가 즐거웠단다.
미치다시피 골프공을 때려대던 그는 1996년 5년만에 프로테스트에 합격한다.
성인이 되어 처음 골프채를 잡은 사람이
5년만에 프로테스트를 통과하여 프로가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열심히 한 것 이외에도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는 걸 말한다.
교고시절 몸짱으로 불렸다.
1999년에는 상금랭킹 9위에 올랐다.
하지만 세금을 제외하고 그의 손에 들어온 돈은 1000만원 남짓.
국내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먹고 살 길이 보이지 않았다.
레슨을 하며 연명을 할까 하는 유혹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게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눈물을 삼키며 현해탄을 건너다
선수로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양용은은 비장한 마음으로 일본투어에 도전한다.
보증금 250만원에 월세 15만원 단칸방에 아내와 두 아이들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떠나던 날, 그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났다.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했던 약속, 10년만 기다려달라했던 그 약속을
비행기에서 수도 없이 되내었다.
독하게 시작한 일본투어는 그에게 삶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2004년 일본 투어에서 2승을 올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골프를 아는 사람들에게 양용은 이름 석자를 알렸다.
양용은이 일본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이는
이미 일본투어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종덕 프로다.
김종덕 프로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회출전 등이 만만치 않았을 터,
일본 진출 후 곧 바로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96년 프로테스트에 통과
섬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어려운 환경에서 늦깎이로 성장하는 후배를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미국무대에 이끌어준 것이다.
하지만 미국무대 데뷔는 쉽지 않았다.
2005부터 자격시험인 퀄리파잉 스쿨에서 두 번 연거퍼 떨어진 것이다.
물론 이 기간 커다란 성과도 있었다.
2006년 한국 오픈 우승선수의 자격으로 출전권을 얻은
유럽투어 HSBC챔피언십에서 타이거우즈를 꺾고 우승컵을 안은 것.
이때 이미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양용은은
2009 PGA챔피언십에서 다시 한번 우즈를 꺾는 기염을 토하며
우즈 킬러로 부상하게 된다.
미국무대에서
PGA 첫승! 혼다클래식 우승장면
대망의 미국무대에 나섰지만 역시 미국무대는 쉽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과는 달리 코스의 길이가 길었고
세계 정상급 선수들에 비해 비거리에서 밀리는 그로서는
경기 운영에서 많은 핸디캡이 있었다.
결국 29개 대회에 나섰지만 절반이 넘는 17차례에서는
컷통과마저 못하였고 상금순위는 157위로 밀려났다.
천신만고 끝에 쟁취한 투어자격도 날라갔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핸디캡을 절감한 그는 본토의 체계적인 레슨을 받았다.
처음부터 독학으로 시작한 그는 체계적인 레슨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스윙교정을 위해 기초 ABC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양용은은 이때를 회상한다.
"골프 인생을 건 마지막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죽을 각오로 스윙교정에 매달렸다."
또한 비거리 극복을 위해 새로운 클럽을 장착했다.
우드의 거리와 아이언의 정확성을 겸비한 하이브리드 클럽을 갈고 닦았다.
200야드가 넘는 거리에서도 핀에 볼을 가까이 붙일 수 있게 되면서
항상 좌절해야 했던 롱파4홀에서도 서서히 자신감이 생겨났다.
올해 다시 퀄리파잉 스쿨에 합격했지만 그는 대기자 신분이다보니
출전 예정선수가 불참해야 기회가 주어지는 신세였다.
1월 소니오픈에서는 하와이까지 날라가 결국 자리가 나지 않아
상당한 비용만 날리고 돌아오는 서러움을 겪기도 했다.
PGA챔피언십 우승하는 순간
그러던 그에게 결국 기회가 찾아왔다.
3월 혼다 클래식에서 PGA 첫승을 신고한 것이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2009년 8월, 양용은은
골프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PGA챔피언십에서
그것도 이 시대 최고의 골퍼로 불리는 타이거우즈와 맞붙어 우승한다.
우즈가 3라운드까지 리드하던 경기에서 막판에 역전당한 경우는
평생을 통틀어 37번 가운데 단 한 번,
메이저 14차례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을 만큼
우즈는 4라운드에서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그의 카리스마에 세계 정상급 선수들도 질려버리고 스스로 무너지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양용은은 달랐다.
위기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샷을 날렸고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스윙교정의 효과가 그를 새롭게 만들었고 새로 장착한 클럽이 빛을 발했다.
그의 거침없는 샷에 주눅이든 것은 오히려 타이거 우즈였다.
심리적으로 흔들린 우즈는 퍼트에서 번번히 고개를 떨궜다.
삶의 명장면
우즈의 축하를 받는 양용은
그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 감동을 자아내고 있는 양용은.
생활기록부에 남아있는 17살 그는 단지 '내성적이지만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학생'이었다.
이제 그는 그의 모교인 제주고(옛 제주농고) 교문에 플랭카드가 걸린 사람이 되었다.
학교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하면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용은이의 모습에서 학생들이 많은 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미국 진출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양용은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꿈을 향해 도전한다면 반드시 기회는 찾아옵니다. 최경주 프로도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성공했다고 봅니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실패해도 또 다른 연장전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꿈의 트로피
"지금도 골프코스에 서면 가슴이 뿌듯해요. 어린 시절 제가 여기 서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소명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평범한 사람이 자신을 들뜨게 만드는 신나는 일을 만나게 되고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몰두하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에 물러서지 않고 맞서며
작은 성공에도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도전에 임하게 하는 것.
그러다 문득 뒤돌아보면 많은 이들이 환호하고 있는 것.
그리고 ...
자신이 이 지구에 왜 왔는지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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