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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뉴스에 대해

신정아 교수 2004년 주간조선 인터뷰 발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7. 14.

삼풍백화점 사고에 대한 인터뷰 원문. 주간조선 기사 찾기가 힘들더군요. 조선일보 DB에는 삭제가 되었는지 페이지 로딩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단에 원문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을 읽다보니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추진력을 갖게된 계기를 설명하는 맥락으로 보입니다.

“미술에 대한 봉사 정신 있어야”

“큐레이터는 작가와 작품을 보살피는 사람이에요. 따라서 헌신, 봉사, 열정이 중시되죠. 한 마디로 미술에 대한 봉사 정신이 있어야 해요. 또 예술적인 안목과 비즈니스 감각이 중요하죠. 전시기획뿐만 아니라 ‘펀딩’을 해야할 때가 있기 때문이에요. 외국의 경우 큐레이터가 미술과 경영을 함께 전공하는 경우가 많죠.”

신씨는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를 중퇴하고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캔사스주립대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캔사스주립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1997년에는 예일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코스워크(coursework)를 마친 상태. 올해 말까지 논문을 쓸 예정이다. 1998~2001년 금호미술관에서 수석큐레이터로 근무했고 2002년부터 성곡미술관 수석큐레이터를 맡고 있다. 그는 큐레이터의 자질로 미술에 대한 봉사 정신뿐만 아니라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추진력을 재차 강조했다.

“원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1995년 삼풍백화점 사고를 당하고 난 후 추진력이 강해졌어요. 당시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했다가 백화점에 들렀죠. 콘크리트더미 속에 24시간 동안 깔려있다가 구조됐어요. 여자로서 다행이었던 것은 해변용 타월들이 건물 붕괴와 함께 바람에 날려 제 얼굴을 완전히 감싸주었어요. 내장이 파열되고 뼈가 부서졌는데 얼굴은 말짱했죠. 지금 제 인생이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모든 일들이 쉬워보이고 추진력이 강해져 일도 잘 풀려요.”

신씨는 초등학교 ‘짝꿍’ 때문에 큐레이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남학생은 그림을 잘 그렸는데 집이 가난해서 물감, 크레파스 등을 자신에게 빌려 썼다는 것이다. 결국 ‘짝꿍’은 공고에 진학했고 신씨는 어린 마음에 그런 친구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기자가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그는 ‘가나가와 세계 어린이 비엔날레’를 준비 중이었다.

“유명작가 전시회가 안전하기는 하지만 무명작가를 발굴해서 전시회가 성공하면 큰 보람을 느껴요. 누군가를 돕는다는 느낌도 들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큐레이터는 전시회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결국 2인자죠. 그래서인지 전시 오프닝날은 왠지 쓸쓸하고 전시회가 끝나 작품들이 실려나갈 때면 더욱 허전해져요. 물론 한국 작가를 해외에 알리는 데는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이지만요.”

그의 말처럼 큐레이터는 문화의 ‘중개자’이며 ‘발명가’이기도 하다. 예술가 못지 않은 창의적 작업을 하는 것이다. 물론 작품을 제작하지는 않는다. 큐레이터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또 다른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의 노력에 따라 무명 작가가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도 하고 예술을 이해 못하던 대중들이 예술작품을 사랑하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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